autel online sell: autel maxisys pro autel md802 autel maxidas ds708

也山 李達 先師

“내가 비록 만인 가운데 한 어리석은 필부이나 어찌 천 번 생각한 가운데 한 가지 얻음이 없으랴!
감히 만 가지를 하나로 줄인 몇몇 글과 말을 기록하여 책상자 머리에 표기하고 잠가 놓으니,
자물쇠의 열쇠를 지닌 후학을 기다린다.”

 

 <야산 선사 생애>

1) 단기4222년(己丑년. 서기1889)

– 9월 16일 慶北 金陵郡 龜城面 上院里의 마들이(馬杜里)에서 출생.
姓은 李氏요 貫鄕은 延安이며 諱 侚永, 字는 汝會시다.

※ 출생시 모친 胎夢에 鳳이 대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하여 兒名으로 ‘봉’이라 불렀다 한다.

2) 단기4226년(서기1893) 5세

– 마을 서당에 입학

※ 5세 학동의 영민함으로 김천 鄕里에서는 金時習의 화신이라고까지 하면서 극찬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숙부는 오히려 어린 조카의 자질이 지나칠 정도로 비범함에, 혹 해가 될까 우려한 나머지 일체의 서적을 보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7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책을 펴 보이고는 오로지 조카만을 가르쳤다.

3) 단기4233년(서기1900) 12세

– 사서오경을 통하다.

* 글을 읽으며 의심난 곳을 지적
㉮ 주역의 ‘韋編三絶’ ㉯ 논어의 ‘冠者五六人과 童子六七人’ ㉰ 맹자의 ‘學不厭敎不倦’

4) 단기4236년(서기1903) 15세

– 대학이 錯簡되었음을 지적하고 攷定하기로 결심

– 음12월 15일 崔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결혼

5) 단기4236-40년 15세-19세로 추정

– 三道峰 石奇峰에서 修道
※ 숙부의 命으로 三道峰을 중심으로 여러 산을 다니며 修道하였으며 득도후 다시 속세로 나왔을 때에는 거짓 미친척 함으로써 世人들은 狂人이라고 손가락질 하였고, 당시의 일본경찰들도 주역으로 광인이 되었다는 생각으로 선생을 ‘李周易’이라 별명하였다.

6) 단기4240-41년 19세-20세로 추정

– 甑山先生과 面對

※ 伯峰 金三一(증산선생의 양외손자)의 말에 의하면, 증산선생이 여러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오는 성인이 있으면 가는 성인도 있는 법이다. 너희들이 앞으로 모르겠거든 야산선생집 벼름박(벽)을 보도록 하여라”고 했다 한다.

7) 단기4242년(서기1909) 21세

– 4월 28일 맏아들 震和 출생

– 10월 16일 母親喪 당하여 3년을 侍墓하였다.

8) 단기4245년(서기1912) 24세

– 12월 26일 둘째아들 坎和 출생

9) 단기4247년(서기1914) 26세

– 9월 9일 부친상을 당하여 삼년 시묘하다.

10) 단기4249년(서기1916) 28세

– 금강산에서 百日공부

※ 선생은 道伴인 최재규,홍부일,이세영과 함께 백일공부를 마치고 出山하면서 스스로 ‘達’이라 칭하며 이름으로 삼았다. ‘달’로 이름 삼은데 대하여 선생은 “선천은 양이 주장하고 후천은 음이 주장하니 곧 달로 이름한 뜻이라”고 하였다.

※ 입산 도중 尙州의 某氏 집에 들러 시국에 관한 대화를 하던 중 비분한 나머지 『過尙州感吟』詩를 지었는데 그 내용 중에는 「是日曷喪 汝及予偕亡과 始聞人間有天皇」이라는 글이 담겨 있었다 하는데 결국 이 시가 화근이 되어 가택수사를 받고 구류까지 받게 되었다.

– 長女 巽和 출생

11) 단기4250년(서기1918년) 29세

– 김천 고향의 伏虎洞 齋室에서 訓蒙

※ 당시 마을에서는 ‘지면 이지게요 벗으면 이선비라’하며 칭송하였다. 선생은 이곳에 거처하며 재실을 중창하던 중 좌측 방 대들보 위에 태극도를 그리며 좌우로 석가래 일곱 개씩을 축조하여 지었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해방이 7월 7일에 이루어 질것임을 암시한 것으로 선생은 나라의 독립을 예견하며 학동들을 가르쳤던 것이다.

※ 이 외에도 代項面 大成洞(일명 孔子洞)과 三道峰, 居昌에서도 훈몽하셨다 한다. 혹 이때에 也山이라 自號한 것으로 판단.

12) 단기4251-4256년(서기1918-1923) 30-35세

–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전국을 周遊

※ 선생의 계속적인 抗日 云云으로 日警의 要視察對象으로 지목 되었으며 왜인의 핍박을 피하려 함은 물론 좀 더 큰 뜻을 펴기 위해 道伴인 최재규와 함께 대부분을 지리산 속에서 수도하였고 주로 전라도 여행을 하며 견문을 넓혔다.

– 단기4252(서기 1919) 31세

3.1운동이 일어나던 날, 선생이 사람들의 마음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미친 듯이 눈을 감고 장대를 휘둘러댔다. 그러자 사람들이 저 사람 미친 사람이라고만 말할 뿐 아무도 제지하거나 말리려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선생은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오늘의 조선인이 이 지경을 당한 것이 다 까닭이 있는 것이니 누구 탓을 하랴!”하였다 한다.

※ 이는 애국애족과 斥邪反正의 사상은 투철하였으면서도 의병이나 광복 등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으니 大自然無抵抗主義로 신조로 삼으셨음을 엿볼 수 있는 단면이다.

13) 단기4254년(서기1921) 33세

– 셋째아들 艮和 출생

14) 단기4257년(서기1924) 36세

– 米豆와 金鑛事業

※ 세상은 갈수록 혼미해지고 民生은 날로 궁핍해지자 救人救族의 方便으로 3600만원 운운하고 “내가 돈을 벌어 조선인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한다면 결국 나라의 독립도 이루지 않겠는가”하며 誓願을 세우고 대구에서 미두를 하며 영천, 성주, 무주, 문경등 15개 처에서 鑛主노릇도 하였다.

15) 단기4261년(서기1928) 40세

– 4월 6일 숙부 별세

16) 단기4262년(서기1929) 41세

– 철원에서 공동생활

※ 선생은 강원도 철원지방에 수십만평을 매입하여 농장을 크게 짓고 고향 김천에 내려와서 貧民 20여호를 이주시키고 그곳에서 공동생활을 영위하였으니 대략 5년간의 일이었다.

17) 단기4264년(서기1931) 43세

– 만주사변 발발

18) 단기4267년(서기1934) 46세

– 星州 별지에서 鑛主生活

※ 형제지간인 判永, 아들 진화와 간화, 조카 丙和와 함께 주로 금광 채굴을 하고 형석광도 채취하였다.

19) 단기 4269년(서기1936) 48세

– 대구 비산동에서 거처를 마련

– 넷째아들 離和 출생

20) 단기 4270년(서기1937) 49세

– 강화의 선친(姜涑)이 비산동으로 이사 와서 선생과 사귀다.

※ 강화 형제와 그의 아들 4형제가 모두 門人이 되다.

21) 단기 4272년(서기1939) 51세

– 다섯째아들 兌和 출생.

22) 단기4273년(서기1940) 52세

– 11월 24일 裡里 墨洞으로 이사

※ 선생은 이리에 사는 동안 줄곧 暗遯之計로 거짓 미친 척 생활하였다.

– 大悟齋 宋乙奎선생과 만남.

※ 송선생은 구한말 4대 기인 중의 한분인 문도사의 수제자로 仙道를 통한사람이며 그의 따님을 야산선생의 3남인 간화와 혼인시켜 사돈지간이 됨.

※ 大田 飛龍洞의 飛龍山頂(대청호 옆)에 있는 큰 바위(일명 신선바위)에 ‘號神發’이라 쓴 옆에 ‘惺惺主人翁 皇皇上帝位’라 刻한 것이 있은데 이 글은 송선생이 제안하고 야산선생이 새겼다 하며 뒤의 惺惺主人翁은 송선생의 別號이다.

23) 단기4274년(서기1941. 辛巳年) 53세

-「선후천고정설」을 짓다. [야산선생문집 참고]

24) 단기4276년(서기1943. 癸未年) 55세

– 12월에 동네에 전염병(장질부사)이 퍼졌으며 선생을 제외하고는 식구 모두가 열병으로 차례차례 몸져누웠다. 이듬해 3월까지 열병이 계속되었으며 이로 인해서 조카인 무화가 죽었다.

25) 단기4277년(서기1944. 甲申年) 56세

– 7월 6일(陽 8월 24일) 庚元歷 창제

※ 선생은 문경새재에서 백일기도를 마치고 矢弓洞에 있는 姜錫熙씨 집에서 남녀 36명과 함께 방아찧는 행사와 풀무놀이를 행했으니 이것이 바로 俗傳하던 姜太公의 조작방아를 의미하던 것으로 甲이 庚으로 탈바꿈 되는 ‘四作庚申(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경신시)’의 날이다.

※ 이 당시에 선생은 亂世救命의 방편으로 呪文도 사용하였는데 ‘太乙无上玉淸皇, 南舞觀世音菩薩, 乾元亨利貞水火木金土皇極敷, 太乙元符與諸星歷庚’ 36자로 이루어져 있다.

26) 단기4278년(서기1945) 57세

– 2월 대둔산 아래 水落里로 이사하다. 선생은 마을 앞 孤雲寺에서 거처.

※ 9월에 가족들이 이리에서 이사 오고 강화 식구들과 함께 거처하였다.

– 7월 7일(양8월14일) 七夕일에 鷄鳴三唱하고 이튿날 문경에서 광복일(8월15일)을 맞다.

※ 査頓인 宋大悟齋와 宋秉天 등 몇사람과 동반하여 山淸 花溪里 吳氏 집에서 一宿 도중 사람들로 하여금 鷄鳴三唱케 하여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광복이 됨을 암시하고 이튿날 聞慶에 가서 萬歲三唱하였다.

27) 단기4279년(서기1946) 58세  

– 봄에 石井庵에서 후진 양성

※ 屯字는 만물이 始生하는 뜻이므로 해방후에 인재양성이 시급하다며 사람을 가르치는 시초로 대둔산을 수도의 도장으로 삼았다. 선생은 石泉庵 문에 ‘石井’이라 내걸고 제자를 가르치니 통강한 자 108명에 이르렀다.

– 三敎合一의 시초를 이루다.

※ 선생은 언어는 선으로, 모습은 불로, 글은 유로 하셨다. 그 증거로 유건에 유불선 삼도를 표시하셨다. 또한 좌수는 仙이요 우수는 佛이며 손바닥을 마주치면 屯生이 되니 儒가 된다.

– 8월 이달원 입문

– 정동한 입문

– 유해철 입문. 海印이 찍힌 부적을 선생에게 드리다.

– 9월 김종덕 입문

– 가을에 홍역학회 창립

※ 제자들이 觀하는 중에 논산 부황출신인 尹某氏가 관하던 중, ‘乾一周’라는 글이 보이고 尼山 鄭東漢에게는 ‘旣誠明倫’이라는 글이 보인 뒤에, 선생은 이 證驗을 보시고 ‘洪易’이라 이름 삼으시며 ‘敷文’을 짓고, 제자들로 하여금 주역과 홍범구주를 專攻케 하고 홍역학 회원을 모으니 무려 12,000명에 이르렀다. 이에 이 모임을 ‘無盡海會’라 이름 삼기도 하였다. (오늘의 동방문화진흥회는 과거 홍역학회의 맥을 이은 것이며 세상을 위하여 出門同人코자 하였던 선생의 유지를 받든 것이다.)

– 11월 김석진 입문

28) 단기4280년(서기1947) 59세

– 2월 조용춘. 박붕래 입문.

– 권인택 입문

– 장영식 입문

– 개태사 화주부인(김광영)이 뽕나무 작대기를 가져와서 선생께 드리다.

– 여름 홍역대학원 설립에 대해 언급

※ 제자인 김종덕이 선생을 모시고 서울 가는 도중 천안에서 하루를 유숙(天福旅館) 하였는데 선생이 홍역대학원 설립에 대해 말하길 “乾策이 216이요 坤策이 144라 360이 되고 卦數가 64이니 교실 한칸을 64평으로 하여 360칸을 만들고 32명씩 수용한다면 11,520명(萬物之數)이 되고 이를 12층 높이로 짓게 되면 전체가 4,320칸이 되어 인원을 138,240명을 수용하게 되며, 별관을 5칸으로 역시 12층을 짓게 된다면 60칸으로 이루어 지니 기왕 계획할 바에야 이와같이 한다면 세계 제일의 대학원이 될것이다”고 하였다.

– 7월 20일 초대 대통령선거 실시

※ 영친왕 환국문제 거론(復辟운동)

※ 이승만 대통령 당선 후 李受堂翁(이승만대통령과 인척지간) 방문

– 가을 李대통령의 개인비서인 黃규면氏 來訪

※ 선생이 되돌아가는 황비서에게 「鵻巢幽林 不過一枝 隱鼠飮河 不過滿腹」이라는 글을 적어 주었다 한다. 황비서는 후에 선생이 옥가실에 계셨을 당시에도 장이석씨에 앞서 방문한 적이 있었다.

– 9월 9일 開泰寺 創運閣 상량식을 거행하다.

※ 선생의 시주로 창운각을 건립했다. 開泰寺 화주부인이 海印의 뜻을 물으므로 선생이 해석해주다. 선생은 해인에 새겨져 있는 16자(聖夢化領 賢氤梵光 敎導天師 玖妙亦暎)를 해석하고, 「海印經」을 지어 제자들에게 외라 하셨다.

– 12월 초 서산군 남면 達山里로 이사

※ 이듬해 초겨울에 안면도로 이사했으며 선생은 이곳을 安民島라 하고 ‘후천을 여는 곳’이란 뜻으로 ‘開洛金’이라 改名하였다. 당시 제자들은 선생을 따라 300가구가 서태안 일대로 이주했다.

– 12월 26일 開泰寺 申命行事

※ 석정사 폐문 후, 제자 108명에게 庚字에 海印이 찍힌 護身符를 나누어 주고 뽕나무 작대기에 오동나무 지게를 짊어지게 한 다음 9명씩 12단위(12金部)로 나누어 개태사에 가 행사를 마쳤다. 이 날은 후천이 시작되는 立春節로서 庚申日이다.

– 鷄龍山 國師峰아래 龍鶴寺에 머무름.

※ 선생은 식구들을 안면도에 보내고 12명의 제자들과 용학사에 거주하였고 그곳에서 ‘先天除夕’의 시를 짓다.

29) 단기4281년(서기1948) 60세

– 3월 초 고향 김천을 다녀오다.

– 4월 초 용학사에서 가까운 佛岩寺에 기거

– 4월 30일 32배합인이 대부분 서대산 성당리의 대오재선생 집에서 강을 받다.

– 5월 2.3명의 제자와 함께 단양의 장영식 집에 가다.

– 9.19일 제자 조용춘을 동곡 강순임에게 보내다.

– 10월 「太極之下宗敎聯合會」를 결성.

※ 본부는 대전 선화동에 사는 柳一佑의 집에 두고 불암사 주지로 있던 南宮圭를 宗正으로 추대하였고 會 傘下에 正義軍 조직도 하였는데 이는 자생적 민간조직단체인 것이다. 太極圖를 그리고, 태극기와 手旗를 제작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다.

– 10월 김종덕과 함께 안동에 가다.

麗順叛亂事件이 일어난 중에 安東에서 義城약국(선대부터 운영)을 경영하던 김윤환이 安東署에 잡혀 들어간 사실을 알고(사흘정도 구류) 가서 구해오다.

– 대전 선화동 유일우집에 거주하다.

※ 이때 배운 제자들은 이광근 및 형제들과 김영익, 박노철(갑하산 아래에서 단군봉숭), 정석모(당시경찰서장), 이무진(논산 노성사람), 요다(일본군 중령출신), 김일도(공주산성동)등이었다.

– 12월 제자들이 敎思契를 조직하다.

30) 단기4282년(서기1949) 61세

– 대전 보문산 석굴암에 12불 조성

※ 선생은 보문산 중턱에 있는 석굴암을 ‘소축(丑)’字 형태로 굴을 파고 이곳을 法性圖의 근원이 되는 자리라 하며 남궁규로 하여금 관리케 하고 ‘法性偈’를 외게 하셨다.

– 대전시 소제동에 있는 妙覺寺(대처승 양정목 주지)에도 자주 들르다.

– 김구의 개인비서격인 吳善直 來訪

※ 김구는 당시 계룡산 36개 단체를 끌어 들여 자신의 입지를 세우기 위하여 합작의사를 밝힌 바 선생은 불가하다 하며 오씨에게 「雲集配水 鳥獸之萬草 一喜一悲 獟犬顆肉 近虎不知」라는 글을 건네 주었다.

– 9월 16일 안면도 達山에서 회갑맞이

※ 선생은 “일찌기 부모에 불효하고 가사를 돌보지 않았는데 어찌 회갑이라 잔치하겠는가? 하시며 회갑 잔칫날 제자 몇 분을 데리고 이리 묵동에 가다.

– 대전에 있는 만주약방을 들르다.

※ 영친왕 환국문제로 당시 내무부장관을 지냈던 김효석(초개사람), 대전의 송씨 (육군중장 동춘당 후인인 宋種玉?)등이 만주약국에서 선생을 찾아뵙고 시국을 토로하였다.(선생문집 ‘田家憂豊’참조)

– 사회부 장관을 지낸 錢鎭漢 來訪(선생문집 ‘讀易有感’ 참조)

※ 이 후부터 정부에서는 정의군조직이나 복벽운동 등을 통해서 공산으로 지목하기도 하고 감시하기도 하였으니, 담당검사가 오제도였으며 대전 김천 안동등지에서의 경찰조서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한다.

– 초겨울 안면도 삼봉의 용굴에서 고사를 지내다.

– 최종록. 김병호 입문.

31) 단기4283년(서기1950) 62세

– 4월 8일 광천에서 난을 무사히 치르고 세상을 구제하기 위하여 先聖諸位께 치성을

올리고 고유.(선생문집 ‘정전부식수분’참조)

– 5월 10일(양6월25일) 전쟁 발발.

※ 전쟁이 일어나던 날 새벽에 선생은 실공장에서 가져온 끊어진 실을 이으며 난리를 맞다.    (선생문집 ‘治絲閑話’참조)

– 6월 24일 광천 烏棲山 萬丈庵에서 잠시 머물다.(선생문집 ‘廣川烏棲山寓吟’참조)

– 7월 그믐 지역 순례

※ 공산당원 감시의 눈길을 피할 겸 흩어져 있는 제자들을 일깨우고 구제하기 위해서 정동한과 함께 각 지역을 순례하였으니 8월 12일간의 일이다.

32) 단기4284년(서기1951) 63세

– 1월 13일 부여 은산 玉佳室(일명 玉敎室)으로 이주

※ 안면도. 광천에서 9.28수복(음8월 15일)을 맞이한 후, 선생은 곧장 부여로 왔고 가족과 대부분의 제자들도 선생은 따라 부여에 정착.

※ 이 해 봄 은산 옥가실의 유지였던 유치돈씨의 배려로 그의 땅인 聖住山 중턱에 「三一學院」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니 남자 64명과 여자 6명이었다.

– 2월 봄. 문인들이 禮送契를 조직하였다.

– 5월 檀皇陟降碑를 세우다.

※ 선생은 「檀皇陟降之位」6자 비문을 손수 정으로 쪼아 새기고 三一壇 위에 세운 뒤에 매년 10월 3일에 大祭를 거행하였다.

– 神誌秘詞를 풀이한 五德印을 판에 그려서 벽에 걸어두다.

※ 오덕지판은 선생이 천서를 받을 당시에 사용하던 판으로 부여로 이사 오시면도 계속 벽 위에 걸어놓았으며 부여의 집 앞마당에는 오덕인를 그려 그 위에 청수를 떠놓고 고천행사도 하였다.

– 天符經을 외게 하다.

– 제자들에게 [진단구변도]를 그리게 하다.

– 7월 三十六卦破字를 짓다.

※ 저녁 무렵에 강당앞 마당으로 제자들을 모이게 하니 자연 49명이요 선생까지 50이었고 사람들로 作卦하니 地火明夷卦가 나왔다. 이에 [三十六破字解]를 쓰다.

– 안동사람인 素谷 權頊淵 來訪

※ 권씨가 태백산에서 檀君이 내리신 글이라 하며 ‘西南得朋 東北喪朋’ 八字를 전하였다.

33) 단기4285년(서기1952) 64세

– 2월 11일 육조혜능 강필.

「道德礎基會」에서 點傳관계로 鄭法山 喆洙가 어린 소년을 데리고 왔으므로 옥가실에서 臨時佛壇을 마련하고 求道를 하니 六祖慧能이 강필하다.

– 3월 15일 단군 강필.

옥가실에서 단군의 강필이 내리니 전에 權素谷에게 전해 받은 8字를 降筆하여 신판 위에 나타냈다.(7언 55구의 385자로 이루어져 있음) 선생은 비로소 得喪圖를 지어 제자들에게 보였다.

– 3월 28일 노군 강필.

도덕천존 노군이 천명을 받들어 강필하였는데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때부터 『노자청정경』을 제자들에게 외우며 공부하라 하셨는가 싶다.(3주간)

– 4월

張勉총리의 對外顧問을 역임한 洛圖 張履奭 내방.

– 4월 하순, 한 달 동안 고향 김천을 거쳐 부산의 도덕초기회를 다녀오다.

– 5月 21日 노자 강필.

부산의 수정동에 있는 道德礎基會에서 貫頂詩라는 제하에 노자의 飛鸞(降筆)이 내렸는데 이 글에서는 야산이 신지의 후신임을 밝혔다.

– 윤5월 15일

대구 수성구 高明壇에서 太乙分班에 대해 飛鸞이 내리다.

※ 分班은 河圖班과 洛書班을 나눈다는 것으로, 즉 선천은 하도요 후천은 낙서니 선천 河圖는 중국의 黃河를, 후천 洛書는 한국의 洛東江을 비유해서 선천이 지나고 후천이 도래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 7월 15일

周易講을 마치고 64명에게 주역 수료증을 주다.

※ 선생은 이들에게 “學易人으로 洪易의 도를 널리 전하라”고 말했다.

– 10월 3일 開天祭 거행

※ 이후부터 매년 10월3일로 개천제를 거행하였다.

– 김옥임 입문

※ 김씨와 더불어 여자 6명이 주역을 공부 했으니 후천시대에 坤道가 주장이 됨을 기수로 맞춘 것이다.

34) 단기4286년(서기1953) 65세

– 3월 15일 삼일단에서 단황 御天祭를 지내다.

– 3월 17일 부여읍 구교리로 이주.

※ 선생은 백마강이 바라보이는 곳에 집을 얻어 거처하고 백마강변에 落花生(땅콩)을 재배토록 하여 궁색한 식량을 다소나마 해결.

– 11월 부여읍 東南里로 이사

– 동지달 월륜도를 그리게 하다.

35) 단기4287년(서기1954) 66세

– 2월 1일 甲午 申命行事

※ 집 마당 가운데에 황토흙으로 五德地를 새기고 그 위에서 天祭(建正大祭)를 지낸 다음 鼓之舞之하며 神道를 행하였는데 이 행사중에 선생은 神道로써 五代聖人과 左右日直神을 封하고 기타 歷代의 여러 聖神을 設位하여 告天하는 등 先天事를 매듭지었다. 이 날을 太乙上帝入關建正日로 삼다.

※ 어느 누가 당나라 李長吉이 지었다는 [玉樓記]를 가져오자 선생은 [十二龍記] 및 [周易彖辭圖]와 [周易象辭圖]를 같은 형식으로 그렸다.

– 2월 초순 박만수 자제 來訪

– 2월 8일 부여향교에 참알.

일족인 이만승과 상견한 바, 그가 始祖墳墓가 실전되었음으로 조사해서 찾는 일과 종중의 관한 사업을 계승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延李의 연원이 실전된 것과 世系를 다시 회복하려는 뜻을 상의했다.

– 3월 3일 이만승씨의 [추원보]서문을 지어주다.

– 5월 5일 달놀이 행사.

※ 여러 제자들과 더불어 扶蘇山 迎月樓에 올라 달놀이 함.

– 여름

연원보를 들고 김천 종중에 갔다. 그곳에서 입암공과 족보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다.

– 이승만 대통령이 운을 띄우며 신문에 개재하여 널리 글을 모으자 선생이 운에 맞춰 화답.

– 8월 강화가 선생을 모시고 부산 도덕초기회를 방문하여 신소천과 대화하다.

– 9월 符印要義序 및 井田囷義序를 짓다.

※ 오덕인을 改作하였다. 금일 동방문화진흥회에서 사용하는 오덕인이 이때에 개작된 것이다.

– 11월 黑雪이 내리다.

※ 동짓달에 선생 집주위로 흑설이 내리자 선생은 징조를 보고 庚元歷 중앙에 있는 坤卦를 흑색으로 칠했다.

36) 단기4288년(서기1955) 67세

– 6월 24일 김제에 있는 금산법종교 낙성식(景春臺 준공식)때 박붕래를 보내어 부조하다.

– 11월 百濟學會 조직

※ 선생 식솔이 생계가 궁핍해지자 제자들의 간청으로 100명을 한정하고 會를 조직하여 同病相憐으로 同力相濟하기를 바라며 선생의 거처하는 곳을 修道의 장소로서 사용되길 바란 것이다. 그러나 백제회에 가입하려는 수가 백명을 넘어서자 선생은 백제학회를 旣濟會라 하고 뒤에 가입한 49명과 부인들 만으로 이루어진 458명에 대해 坎離案을 짓고 千濟學會로써 未濟之遐策으로 삼았다.

37) 단기4289년(서기1956) 68세

– 정월 10일 ‘觀巡旅程’ 작시

※ 병신년 경원설 때에 선생이 경원력 달력 위에다가 백제학회 가입자의 명단을 적고 가입자에게 경원력을 나눠 주었다.

– 정월 증산교인 3인 내방

※ 강증산선생의 외동딸 순임이 보내서 왔다는 증산계 교인이 中和經을 가져 옴에 당시 돈 만원을 주면서 교환하고 여러 제자들에게 玉漏經을 외우게 함.

– 미수 허목의 ‘척주동해비문’을 제자들에게 해석해주다.

38) 단기4290년(서기1957) 69세

– 1월 1일 大學錯簡考正敍記를 짓다.

※ 선생은 15세 적에 지적하였던 대학착간을 고정하는 작업을 시작하여 7월 6일에 訂定기념일로 삼았으며 보문산 석굴암에 있는 불상을 보수하였음.

※「一貫道中行實地 二弓岩下問諸天」

39) 단기4291년(서기1958) 70세

– 7월 초 醴泉 飛龍山 蓮花寺에 가다.

※ 대전 제자인 장경로집에 반달정도 머무른 후  예천군 감천면 자봉리 최종만 집에서 장마로 4일간 머무른 다음 또 강국원 집에서 선생의 최종작인 『紫鳳秋話』를 짓고 연화사로 향함.(선생문집 ‘紫鳳秋話’ 참조)

– 8월 3일 午時 有終

※ 扶餘 龍田里 靑馬山에 葬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