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皐 이응문회장님의 신년사

  정유유감(丁酉有感)

어느덧 잃어버린 세월의 참뜻을 되새기게 한 고난의 2016(병신)년 한해가 흘러가고, 을유(1945)년 광복의 기쁨을 알리던 닭의 해도 어언 72주년째인 2017(정유)년 새해를 맞이한다. 예나 제나 시끄러운 세상사에 관계없이 천지일월은 무사무위(無思無爲)로 우리들을 또 다른 미래세계로 이끌어준다.

궁하면 통하기 마련이듯이 한 과정을 마치면 또 새로움이 열린다. 이러한 자연의 상리(常理)에 대해 공자는 ‘거고취신(去故取新)’의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어두운 밤이 지나면 밝은 새벽이 다시 열리듯이, 해묵은 구습(허물)을 제거하고 새로운 법도(그릇)를 취하라는 말씀이다.

예로부터 선인들의 최고지혜를 담은 역경(易經)은 천추만세를 비추는 거울로 비유된다. 난세의 역경(逆境)을 다스리는 심오한 대자연의 철리(哲理)를 담은 글이어서인지, 미래예측의 기본방편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대학경전에 일컬은 ‘격물치지(格物致知)’란 사물을 극진히 감통하여 그 이치를 알아냄을 이르는데, 그 핵심요체도 역경의 괘효(卦爻)이다.

역경에선 댓가지 49개비로 뽑아낸 64괘로 자연의 생생한 도를 설명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일상생활 중에 무심히 쓰는 ‘칠칠(49)맞다’와 ‘팔팔(64)하다’라는 표현도 비롯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털을 뽑아낸 가죽과 중심과녁을 상징하는 혁(革)이 49번째 괘이고 미래로 끝없이 나아감을 상징하는 미제(未濟)가 64번째 괘라는 점이다.

역경은 64괘를 통하여 자연과 인생을 두루 설명한다. 그 60번째에 물(☵)이 연못(☱)에 적절히 찬 모습인 수택절(水澤節)이란 괘를 두었다. 절은 대마디를 뜻하므로 기본적으로 천지법도인 60간지(干支)를 표상하며, 마치면 다시 시작하는 일월주기를 뜻한다.

단순한 흥밋거리가 아니라 한해 간지를 역경의 순서에 비추어 그 흐름을 전망하고 새 희망을 기원하는 것도 모진 세파에 찌든 우리들을 달래줄 청량한 감로수가 되지 않을까한다.

역경으로 보면 변함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항(恒 32)괘가 32번째 간지인 을미의 해에, 소인배의 음해를 피해 군자가 은둔하는 돈(遯 33)괘가 33번째 간지인 병신의 해에 각기 상응한다.

지난 병신년은 오늘내일 미루며 나태한 마음으로 ‘을미적’거리다 결국 고칠 때를 놓치고 온 나라가 큰 병마에 시달리며 복마전(伏魔戰)을 치렀다. 나름대로 열심히 먹고사느라 바쁜 나날 속에 눈 감고 귀 막았던 우리시대의 부끄러운 자화상이 속속들이 들춰진 한해였다. 모순으로 범벅된 세월의 허상을 정면으로 마주치면서, 한편으론 하늘의 도움으로 모두가 자성(自省)의 등불을 밝히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생각된다. 먼 미래를 위해선 오히려 다행스런 일이다.

삼복(三伏) 무더위는 피서(避暑)와 피둔(避遯)을 하는 때이다. 그 시기가 늦여름 음력 6월인 미월(未月)인데, 역경이치로는 돈월(遯月)이라 표명한다. 돈(遯)은 음물인 어린 돼지가 자라남을 의미하는데, 대개 ‘숨을 둔’이라 하지만 괘의 명칭으로는 ‘돈’이라 읽는다.

미월(未月)은 밖으론 양이 극성한 듯해도 속으론 음이 남몰래 성장하는 은둔의 미래(未來)를 상징한다. 미래란 반드시 밀려오기 마련이지만 본시 드러나지 않는다. 돈괘는 하늘(☰) 아래 산(☶)이 있는 형상이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라는 속담처럼 고대한 하늘아래의 작은 산은 은미하므로 잘 보이지 않는다.

역경이치로는 하늘은 산에 응한다고 한다. 도학의 측면에선 작은 산임에도 능히 큰 하늘을 등에 짊어진 천산돈은 은둔군자의 나라로 일컬어진 우리나라와 깊은 관련이 있다. 미래후천을 여는 관문으로서 숨겨진 천문(天門. 성품의 문)을 암시한다고도 한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동북 간방(艮方)의 산언덕으로 일컬었다. 동방의 푸른 언덕이란 뜻에서 지명을 청구(靑丘)라 하였으며, 이곳에다 국조 단황(檀皇)은 새벽의 밝고 깨끗함을 여는 조선(朝鮮)이란 국호를 정하고 배달의 기틀을 세웠다.

‘빚’에 점 하나를 더하면 ‘빛’이란 글자가 되고, ‘그칠 간(艮)’에 점 하나를 찍으면 ‘어질 량(良)’이란 글자가 된다.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아리고 쓰린 아리랑고개를 또 이렇게 넘어감이 무궁화와 태극기를 국화와 국기로 쓰는 대한민국의 소명인가 싶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던 해(1948)에 떴던 큰달이 마침 68년 만에 우리를 다시 환히 비춘 것도 깊이 음미해볼 일이다.

새해 정유년은 34번째 간지로 정대하게 하늘의 문을 여는 뇌천대장(雷天大壯. 34)에 상응하는 해이다. 우레(☳)가 하늘(☰) 위에 웅장하게 울리는 모습으로 양의 밝은 기운이 성대해지는 때이며, 한봄 음력 2월인 묘월(卯月)에 해당한다. 역경이치로는 대장월(大壯月)이라 표명한다.

대장(大壯) 형상을 본받아, 군자는 “예가 아니면 밟지 아니한다(非禮弗履).”고 공자는 말씀하였다. 하늘의 명을 바탕으로 힘차게 움직이는 우레와 같이, 정대한 행보로써 예를 실천하고 이행하라는 가르침이다.

묘(卯)는 문(門)을 양쪽으로 활짝 연 모습을 나타낸다. 정동방과 중춘에 해당하므로, 사람의 어진 덕성인 인(仁)에 상응한다. 성선설(性善說)을 가르친 맹자는 “어진 이에게는 아무런 적이 없다(仁者無敵)”고 하면서 인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논어(論語)에도 제자인 안연(顏淵)이 인에 대하여 공자에게 여쭙자, 사사로운 욕심과 기질을 이겨내고 자연스런 예로 돌아가는 ‘극기복례(克己復禮)’가 바로 인이며, 하루라도 진실로 인을 회복하면 천하가 모두 인으로 돌아온다는 ‘천하귀인(天下歸仁)’을 말씀하신 대목이 있다.

인을 실천하고 구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안자의 거듭된 질문에는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動)”고 답하였다. 대장(大壯)의 ‘비례불리(非禮弗履)’를 보다 상세히 가르친 내용이다.

자연 질서에서 모든 예절도 나온다. 예(禮)는 체(體)와 통하므로 신체와도 같은 구실을 한다. 예를 세우지 않으면 몸을 바르게 운신할 수 없는 법이다. 대장의 해인 정유년은 마침 대통령 선거도 새로이 치른다. 차분하게 심신의 청정을 회복하여 ‘법등(法燈)’과 ‘자등(自燈)’의 선량한 촛불(良)을 세상에 밝히고, 기본질서의 예를 재정립하여 ‘군자예의지국’의 진면목을 회복하였으면 한다. 세계를 환히 비추는 일월의 등대가 대한민국에서 세워지길 바라는 우리들의 한결같은 마음이 저 하늘에까지 닿아 동심일체(同心一體)를 이루리라 믿는다.

 

 

대구앞산 대연학당의 관생재(觀生齋)에서—-

(사) 동방문화진흥회 회장. 청고(靑臯) 이응문